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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심리관계
제목 마음의 상처에 대한 상담사례

마음의 상처에 대한 상담사례  

주된 성구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이사야 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요한복음 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I.
상담사례:
김인자 성도는 보기에 매우 명랑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가는 곳마다 즐거움과 기쁨을 풍겨주었다. 그에게는 유치원에 다니는 두 자녀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유치원의 일과 자녀들 과외 일로 바빴지만 그 외에도 교회일과 집안 살림에 매우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런 그에게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또 다른 김인자가 그 속에서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든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든 일이다.

  김인자 성도의 부모는 그가 12살 때 이혼을 했다. 부모의 이러한 이혼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그는 10대를 지내면서 자기는 앞으로 절대로 이런 일이 있어는 안 된다고 굳게 다짐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10대 후반에 가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꿈을 꾸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 끝까지 행복하게 살겠다는 계획을 하면서 살아왔든 것이다.

  그러던 김인자 성도가 마음 속에서 울고 지낼 줄은 몰랐다. 김인자 성도의 남편은 폭력적인 남편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경멸하고 아내가 하는 모든 것에 불평을 하고 부부들만 있을 때는 저속한 폭언을 서슴치 않고 퍼부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편은 포르노에 빠졌었고 한 여자와의 혼외 정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지금도 또 다른 사람과의 혼외 정사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다.

  김인자 성도가 이런 것을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실토하면서 그는 남편에게 거절당하고 학대를 받는 상처로 인한 아픔과 흥분된 정서 때문에 눈물을 억제하질 못했다. 눈물이 무너진 뚝에서 물이 흘러 나오듯 쏟아졌다. 그는 그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젊어서 그가 당했든 끓른 기름에 화상을 입었을 때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상담을 받기를 원했던 핵심 내용이었다.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겪고 사는 사람을 볼 때마다 솔로몬 왕의 잠 18:1이 생각난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심령이 상하는 것, 즉 마음의 상처처럼 인간에게 주는 고통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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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갖고 살고 있다. 그 상처의 원인과 정도도 여러 가지이다. 여기서 인간들이 겪는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와 그의 치유법을 성경적으로 간단히 찾아보아 하나님의 치유를 받기 원한다
.

1.
외로움의 상처 - 외로움의 원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1) 가족과의 사별에서 오는 외로움이다.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로 인해 노인들을 양로원에 맡긴다거나 질병으로 인해 요양원에 의탁하고 가족들이 소홀히 할 때 닥치는 외로움은 짙은 안개처럼 엄습해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꿈을 빼앗아 간다. 그러면 외로움과 우울증은 가중된다;
  2) 또 외로움은 누구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도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3) 사회의 비인간화 형상이 외로움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을 IBM 신드롬(syndrome)이라고 한다. 기계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을 박탈하고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인간이 기계 같은 로봇이 되는 것이다;
  4) 인간들의 독신 성향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현재 미국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어느 때보다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1970년대에 비해 4년이나 늦게 결혼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임대 아파트 독신 가구들의 수요가 많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도 제 때에 하지 않으려는 풍조가 생기고 있다. 그래서 마케팅 담당자들도 이러한 홀로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상품들의 크기를 맞추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신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의 외로움도 증가하고 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외롭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의 비개인화 현상(즉 차에 탄 채 지나가며 보는 은행 업무, 간이 음식 서비스 등)이 이러한 외로움의 감각을 더욱 가중 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기계(사람 없는 창구)를 통해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5) 자녀를 혼자 기르는 편친의 수도 대 도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편친들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가족을 볼 때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상처에 대해 더욱 뼈저리게 아픔을 느낀다;
  6)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 심각한 외로움은 영적인 외로움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끊어져 영적인 외로움에 시달리게 됐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졌다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인간은 기계의 발달로 인해 비인간화의 기계문명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어 영적인 외로움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복제 운운도 그만큼 인간의 영적인 외로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사귐(fellowship)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래서 기계하고는 다르다. 조용한 방안에서 혼자 몇날 몇일을 지낼 수가 없다. 우리는 다른 인간과의 사귐이 필요하다. 인간들은 서로 보고, 피부로 접촉하고, 함께 말하고 듣고, 서로 어깨를 비비대야만 한다. 혼자만 있게 되면 고독해서 살수가 없게 된다. 누구에게 소속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구조의 하나이다.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관계를 가져야 인간이라는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물질만으로는 인간은 만족하지를 못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다른 인간과의 관계가 없으면 그의 물질이 주는 만족이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한다. 물질만으로는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의 발달을 염려하는 지각있는 사람들은 외로움이 21세기의 가장 비극적인 질병이고 극도로 광란한 현대 사회의 특징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외로움은 적으나 크나 누구든지 겪는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큰 인물들도 모두 외로움을 겪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여호수아도 모세가 죽었을 때 심한 외로움을 경험했다. 사도 바울도 심한 외로움의 고통을 경험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거의 혼자 하다시피 하면서 그의 외로움은 참으로 힘든 경험이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고 했다.

2.
실직으로 인한 상처 - 어떤 사람이
실직을 경험해보지 않고는 그것이 주는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박영수 형제는 지금까지 실직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근래 경기가 악화되면서 실직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52세나 된 자기를 아무도 채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평생 다시는 직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깊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포도원에서 일할 품군을 채용한 포도원 주인에 관한 비유를 말씀한 일이 있다: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20:6-7).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다 라는 말은 지극히 간단한 말이지만 그가 많은 상처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매일 매일 품값을 벌 직업이 없이 지내야 하고 또 생활의 근거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자로서의 존심이 손상되었음을 말한다.

  인간은 생산성 있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종일토록 놀고만 서있다는 것은 심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뿐만아니라 실직은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페인이 된 것 같은 상처를 갖게 한다.

  한국에서도 IMF로 인한 실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가 되고, 가정이 파괴되고, 부부가 분산되고, 부모 자녀들이 헤어져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는가? 여기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겠는가?

3.
거절당한 상처 - 집을 향해 걸어가는 18세 된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 그는 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낙방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교와 과외 교육을 위해서 부모나 본인이 받은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대학교 졸업생이 취직 면접에서 이번에도 세번째 거절을 당했다. 땅이 꺼져 가는 듯한 충격이었다. 이런 청년들의 부모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크겠는가
?

  대인관계가 깨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좋아해 내가 거절을 받고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거절이야말로 참고 넘기기가 힘든 상처를 준다. 이는 불결하다고 버림받는 것과 같은 상처이다. 어떤 사람이 이것은 문둥이로 취급받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전혀 무가치한 인간으로 느껴져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4.
비애의 상처 - 모든 상처 중에서 뼛속까지 가장 깊숙이 파고들며 고통을 주는 것이 비애의 상처이다. 친구들이 와서 최선을 다해 위로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선의의 말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상사를 당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줄 때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비애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내 몸의 일부를 잃는 것과 같은 아픔이기 때문이다. 다윗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의 장면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3). 이 말씀은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다윗이 얼마나 비애를 경험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비애가 주는 상처이다.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슬퍼하셨든 기록이 세 곳이 있다: 1)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다; 2)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우셨다; 3) 53:3에서는 예수님을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킹 제임스 번역) 분이라고 했다.  

   11장에 가록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은 이제 그가 나사로를 곧 살릴 것을 아시면서도 죽음을 슬퍼하신 나머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우셨다. 마리아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그의 비애의 정서가 폭발했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이나 비애에 대해서 매우 동정하시고 우리의 비애를 같이 나누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 4:15).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비애의 눈물의 화학적 성분은 기쁨으로 흘리는 눈물의 성분과 다르다는 것이다. 고민으로 눈물을 흘리면 몸에서 독소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서적 고통을 육신적으로 방출하게 하시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비애를 참고 억제하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슬퍼하시면서 비애의 방법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5.
패배의 상처 - 직원들이 한달 이상 경쟁입찰을 위해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했지만 낙찰이 되질 않았다. 이들은 패배자의 고통과 아픔으로 인한 상처를 받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어떤 골프 선수가 대회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낙관했으나 마지막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우승 자리를 뺏겼다. 이 또한 고통을 주는 상처이다. Gore 미국 대통령 후보가 Bush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평생을 준비한 자리를 뺏긴 것도 얼마나 큰 상처이며 고통이겠는가? 2004년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대회에서 Howard Dean이 자기가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John Kerry에게 압승을 당했을 때 Dean의 표정은 매우 괴로운 표정이었다
.

  이런 패배는 깊은 상처를 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들은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137:2-5) 라고 했다. 그들은 이방으로 끌려온 상처 속에서 어찌 우리가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이다.

  이 말씀 속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패배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많은 사람들이 기진 맥진해 그들의 하프를 연주할 재주까지 잊을 것이라고 했다. 패배의 상처는 사람으로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한다.

6.
불구자가 된 상처 - 24세가 된 인물이 잘 생긴 대마비(양쪽 하반신 불수) 환자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교통사고로 큰 나무를 들이받아 척추가 상했다. 그를 만난 것은 사고 후 6개월 후였다:
그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습니까?”“참으로 괴롭습니다. 이것을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렵군요라는 말을 하면서 그는 그의 어려움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자기와 비슷한 젊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거나 거리를 다니거나 기타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몹시 좌절되고 마음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마비가 됐거나, 귀가 멀었거나, 눈이 멀었거나, 수족이 절단됐거나, 화상으로 인해 미관손상(disfigurement)이 됐거나, 선천적 결손증(birth defect)이나 근육영양실조(muscular dystrophy) 등으로 육신적 불구가 됐으면 이런 사람이 받은 상처는 가히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힘들 것이다.

7.
꿈이 깨어진 것으로 인한 상처 - Mr. 장 부부는 이민 온 후 돈이 없었지만 꽃가게를 가져보려고 5년간 밤낮으로 고생을 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절약을 해 푼푼이 돈을 모았다. 꽃가게에 대한 꿈을 꾸고 계획을 세밀히 세워 SBL 융자를 신청한 후 그것이 승인이 되어 지난봄에 가게를 하나 차렸다. 그리고 처음 3개월 동안 사업이 잘 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어려운 일이 닥쳤다
.

  Mr. 강의 몸에 병이 생겼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건물주인이 임대료를 40%나 올려야 한다는 통지를 해왔고, 또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꽃가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새 꽃가게 때문에 매상이 떨어지게 되어 Mr. 강 의 가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어 월세를 내기도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꽃가게의 문을 닫고 말았다.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로 인해 그들은 깊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 세상을 원망도 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을까 괴로워하고만 있다.

8.
죄책과 수치로 인한 상처 - 젊은 송명수 형제는 장래가 있는 사람으로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결혼한지 2년만에 아기도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아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바람에 그는 가장으로서 생활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

  그는 회사 공금에서 점심비용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교통비까지 빌리게 되었다. 얼마 후 그의 부채는 $1,000.이 가깝게 되었다. 그리고 날이 가면서 여러 가지 사적인 일에 회사의 공금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것을 컴퓨터 조작으로 은폐해 왔다.

  그러나 결국 올 것이 왔다. 그의 과장이 그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과장이 그의 부정 행위를 캐기 시작해 증거가 잡혀 공금을 $12,000.이나 횡령한 것이 들어 났다. 이로 인해 그는 즉석에서 파면됐다.

  회사에서는 그를 횡령죄로 고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그의 자동차와 집을 담보로 잡았다. 그는 아내와 부모에 대한 심한 수치감과 죄책 때문에 상처를 받아 밤에 잠을 이루질 못했다. 그는 원망과 미움이 섞인 마음으로 번민을 하게 되어 심신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내의 이해와 사랑으로, 또 부모가 회사의 돈을 모두 갚아줄 수 있어 그의 상처는 일단 가신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깊은 상처는 없어지지 않고 남모르게 그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9.
성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인한 상처 -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 성적으로 피해를 받은 것에 대해서 조용히 말없이 상처를 안고 고통을 당한다. 이런 경우에 상처가 가시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두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불명예로 인한 깊은 수치감 때문에 혼자서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면서 산다
.

  사단은 종종 피해자의 잘못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성적 피해의 기억을 사용해 마치 자기의 잘못인양 느끼게 한다. 가해자가 이런 말로 피해자를 위협하는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그래서 너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이런 경우 피해자는 아무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몇 년을 지나면서 고통을 겪는 수가 있다. 강간을 당했으면서도 피해자는 같은 죄책과 수치와 정서적 상처를 경험하는 수도 있다.

   II. 상처를 성경으로만 치유하는 하나님의 방법:

  우리의 상처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와 깨어진 마음을 치유해주시기 원하신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받고 구원함을 받기 바란다.

1.
무엇보다 먼저 관련된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치유의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방법이며 치유의 단계이다. 상처에는 언제나 두사람 이상이 관련되어 있다. 상처를 주는 사람과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내가 피해를 입은 사람이면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내가 치유되려면 먼저 가해자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상처에서나 하나님의 치유를 받고 모든 것이 완전히(항구적으로) 해결되려면 먼저 용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치유하신 방법도 인간이 자기의 죄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속죄의 길을 통해서 베풀어주신 그의 용서와 화해의 길을 밟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

  하나님의 성품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제외하고는( 12:22-32) 우리의 어떤 잘못이나 죄도 용서해주실 수 있다( 34:6-7; 103:3, 10-12).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또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준비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다( 86:5; 5:8).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그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었어도 그의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이 그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를 따라 우리를 용서해주심 같이 1) 남이 나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부터 내 마음속에서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고( 11:25), 2) 그가 나에게 용서를 구하면 언제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며, 3) 또 어떤 종류의 죄도 용서해주어야 한다; 4) 그리고 그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나 공로 등을 고려하지 말고 오직 은혜로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며, 5) 일단 그를 용서해주었으면 그와의 성경적인 대인관계를 다시 속히 갖도록 해야 한다; 6) 또 용서에는 나의 희생과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며, 7) 용서는 완전히 해주어야 하고 그를 비난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죄를 상기시켜서도 안 된다.

  용서는 주님께 순종하는 행위이다( 17:3-10; 4:32; 3:13). 그래서 진심으로 마음에서 해야 한다( 18:35). 용서는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꼭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랑의 행위이다( 103:10; 23:39-43; 5:8). 따라서 용서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1) 내가 받은 상처와 고통을 기록해 두지 않으려는 것이고(고전 13:5); 2) 또 다른 사람에게 가해자의 죄를 가십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며( 4:29); 3) 그 상처를 다시 되씹지도 않고( 4:8); 4) 될 수 있으면 최대한으로 가해자와 성경적인 화해를 하려는 결심이다( 12:18; 고후 2:6-8).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셨다(요일 4:20-21). 용서는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그가 죄를 회개할 때 그를 위로해주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고후 2:6-8). 그래서 용서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무제한으로 해주어야 한다( 18:21-22; 17:3-4).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4:32)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오히려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4:17). 그리고 그를 용서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18:21-35). 또 내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내가 매일 짓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6:14-15; 11:25-26).

  용서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행각에 누어 있던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5:2-9)고 물으셨다. 이런 질문은 그에게 찬물을 끼어 얹은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는 이 질문을 받고 자신을 진실 앞에서 직면하게 됐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그의 질병에 대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의 고통에 대해서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기의 질병에 대해서 변명이나 구실을 댈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자기를 치료할 수 있는 분 앞에 서서 그가 치료를 받기 원하느냐는 질문에 반응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가 순종하고 걸었을 때 그는 온전히 고침을 받은 것이다.

  가해자도 가해자이지만 우선 피해자가 자기의 상처와 고통이 치유받아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치유를 받으려면 먼저 상대를 용서하지 않고는 어떤 인간의 다른 방법을 사용해도 항구적인 치유는 받을 수가 없다. 용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증상을 조금은 낳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기분을 조금은 낳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항구적인 치유의 방법은 아니다. 내가 원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항구적인 치유를 받는 것이다.

  그래도 계속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은 두번째로 어떤 상처로 고통을 당하고 있든 그것을 보는 시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시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 즉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원하신다. 이래야 인간과 인생을 이해하는 성경적 격자(하나님의 계획)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없고, 또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 없고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않는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이래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그의 은혜와 능력과 충만함을 갖게 되고, 또 이것만이 우리의 깊은 모든 필요(상처와 고통을 포함한)를 채워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통해서만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또 모든 것과 관련이 되어 있어 그를 알고 믿는 것이 바로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어떤 상처나 문제를 다루든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소망을 갖게 되면 나에게는 소망이 생긴다( 6:6-7, 14, 18, 23). 또 소망이 생기면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된다( 4:6). 하나님은 감당키 어려운 시험이나 유혹을 나에게 절대로 주시지 않으신다. 고로 상처나 고통의 시련 속에서도 나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말씀대로 행하기만 하면 삶의 모든 문제는 없어지고 또 사람이나 소유나 환경이나 상처나 고통에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가질 수 있다( 119:165; 5:3-12; 14:27; 15:11; 16:33; 17:13; 14:17; 4:4-7; 벧전 1:6-9).

  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36:26-27; 1:6; 2:13). 나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또 변화시킬 책임도 없다( 17:10; 18:1-20; 16:27; 2:5-10; 3:23-25; 벧전 1:17). 다만 나는 나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살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충실히 하기만 하면 된다( 5:23-24; 11:25; 12:9-21; 14:19; 벧전 3:8-9; 4:8)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지면 다음에는 성경대로 벗고 입는 것을 하는 것이다. 변화는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적 변화의 구조는 언제나 성경적으로 벗고 입는 계속적인 과정을 밟는 것이다. 이 과정을 밟지 않고는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상처 때문에 고통을 주는 나의 삶의 모든 분야(생각, , 행동)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은 모두 벗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입어야 한다( 15:4; 딤후 3:16-17; 1:21-25; 벧후 1:2-4). 내가 죄의 옛 습관을 벗고 새로운 의와 거룩함의 생활을 입을 때에만 나의 마음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시작한다( 6:11-14, 16-23; 4:22-24; 2:12-13; 3:5-17).

  성경적 변화는 이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기도만으로도 부족하다. 기도에는 언제나 벗고”“입는 행위가 따라야 변화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언제나 순종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는 언제나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고 또 믿고 행해야 한다.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사랑하는 행위를 하면 된다. 따라서 사랑은 하지 않고 xxx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사랑을 하지 않으려는 불순종이기 때문에 이는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기도이다.

  자기에만 초점을 두고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미움(요일 3:15), 시기/질투( 5:20-21), 두려움(요일 4:18), 반항(삼상 15:23), 교만( 16:18, 29:23), 음욕( 5:28), 분노/악독(4:31-32), ( 16:32, 29:11; 1:19-20), 의심( 1:6-8), 이기심( 2:3-4), 염려( 4:6-7), 궤휼(12:20, 26:24) 등의 비성경적 생각(상처)을 갖게된다. 이런 생각에서 거짓말, 적의, 논쟁, 염려, 조급함, 배반, 중상, 불친절, 편협함, 도박, 허풍, 사통함, 간음, 살인, 동성애 등의 갖가지 비성경적 말이나 행동이 나온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이런 것들 때문에 신체적으로 심장 기능의 저하, 대장염, 편두통, 고혈압, 경련, 발작, 궤양, 불면증, 위장병, 관절염, 신장염, 긴장 항진증, 성병, 죽음 등이 올 수도 있고 이러한 비성경적 생각이 비성경적 행함을 거치지 않고 직접 신체적 장애를 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신체적 장애들이 무조건 죄의 결과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본법을 어기고 아무리 기발한 인간의 방법이나 심리적 방법을 사용해도 상처는 항구적으로 치유될 수 없고 용서와 화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 대해 원한을 갖거나 적의를 품고 용서를 지연하면 우리의 치유가 방해를 받을 뿐이다. 누가 나에게 무슨 일을 했든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과 방법을 항상 기억하고 이에 순종해야 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432). 용서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막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6:14-15). 하나님은 시66:18에서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계시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누구에게 악의를 품으면 하나님의 응답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2.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 넘겨드려야 한다 - 위의 1에서 용서를 했으면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믿음의 행위를 해야 한다. 여행자가 공항의 수하물 운반인에게 자기의 짐을 맡기듯 상처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께 정식으로 넘겨드려야 한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맡겨 버리라는 말씀은 말 그대로 집어던지라는 명령이다.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힘을 다해서 너희 염려와 불안과 짐과 상처를 전부 집어던지고 그것은 이제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생각이나 유혹은 버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벗고”“입는것을 해야 한다.

3.
우리의 상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다른 아는 사람과 함께 나누어라 -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도록 우리를 만들지 않으셨다( 2:18).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2:18).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또 동시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털어놓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5:16).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6:2)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지고 가는 것을 도울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의 무거운 것을 전부 말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처를 혼자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해주고 또 같이 기도할 사람과 그것을 나누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4.
매일 주님께 찬송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처가 있는데 어떻게 찬송을 합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가 찬송을 시작할 때이다. 이럴 때를 위해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61:3).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나타내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흑암 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이 아니다. 찬송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하나님께 찬송하기 시작했을 때 무슨 기적이 일어났는가? 고래가 그를 마른 육지로 토하지 않았는가? 바울과 실라가 지하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미했을 때 무슨 기적이 일어났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옥에 지진이 나게 해 옥문을 열어주시지 않았는가? 그뿐 아니라 그 일로 인해 간수와 그의 온 가족들까지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지 않았는가?

  상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시 95-150장을 읽고 찬미하기를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5.
매일 수시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상처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해주신다. 기도의 최고의 본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중보하셨다( 17
).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상처를 허락하셨다면 그 상처를 또한 거두어 주실 수 있고, 또한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그 상처 때문에 우리를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이끌어주시기를 원하신다.

  상처를 겪었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더 민감해지고, 더 인내할 수 있고, 더 이해할 수 있고, 더 온유하고 부드러울 수 있다. 상처는 우리를 더욱 하나님께 의존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고 하셨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겪은 상처, 거절, 고난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그의 상처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상처를 사용하셔서 그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존하도록 교육을 시켜주셨다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나 좌절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심한 상처를 겪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들어 세워주셔서 상처를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돕도록 하시는 것을 종종 불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김인자 성도는 그의 상처를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남편에게 가서 그가 자기에게 끼친 비해와 상처를 모두 용서해 주었다. 그러자 그의 남편도 변화되고 자기도 과거의 모든 상처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그 후 자기가 겪었던 상처와 고통의 경험 때문에 다시 시험을 받거나 유혹을 받으려고 할 때 1) 나는 가해자를 이미 용서했다고 다짐하고, 2) 그 상처는 이미 하나님께 넘겨드렸음을 재확인하고, 3) 주님께서 그것을 이미 치유해주셨음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4) 이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5)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함으로 그 상처가 재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른 상처의 항구적인 치유와 변화도 같다.

  이제 그들은 더 풍성한 은혜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III.
상담에 필요한 추가 성구들
:
55:22; 56:3-4; 121; 3:17-20; 3:17-19; 33:27; 3:1-10; 10:46-52; 13:5; 고후 1:3-7; 고후 3:4-6.
    

작성자 holylife